박세연 '청강창극단' 대표 인터뷰
장성 출신의 거장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 기억 소환
북이면에서 동네 돌며 지난 1년여간 창극공연 펼쳐
9월, 장성군주최 실경창극 '선비의 길' 필암서원 공연
“소리 꽃이 피었습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고법과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호 심청가 이수자, 전남대학교 소리문화연구소 연구원으로 인동초 전국 국악대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박세연(46) 청강창극단 대표를 마주하면서 아련하게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가 소환되었다.
더 정확하게는 서편제의 주인공인 오정해가 박세연 대표와 겹쳐 보였다고 하는 게 옳겠다. 요 며칠 선선한 날씨와 더불어 투명한 햇살이 서편제에서 진도 아리랑을 부르던 그 언덕길을 펼쳐내며 한국 영화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롱테이크 촬영 신을 더듬어 냈다.
판소리와 어우러져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산천이 펼쳐지고, 임권택의 영화마을과 박 대표의 고향인 서삼면의 축령산까지 이미지화되면서 영혼까지 맑도록 담아내는 우리의 소리가 가슴을 헤집었다. 그에게서 “소리 꽃이 피었다!”
사람마다 그 본연의 향기가 있게 마련이듯 그에게서 오정해가 보이고 서편제가 그려지면서 우리 고장 출신의 임권택 감독까지 자연스럽게 하나의 앵글에 담아진 것이다. 이것이 그라는 사람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이자, 박세연 대표가 지니고 있는 ‘정체성’일 게다.
‘아리 아리랑/쓰리 쓰리랑/아라리가 났네∼’. 장성군 남면 출신의 한국 영화계 거장 임권택 감독이 빚어낸 불후의 명작 서편제는 신산한 인생살이를 닮은 듯 구불구불 황톳길을 밟으며 노래를 부르고, 노래는 진한 소리가 되어 먼 길의 끝에 마침내 당도한 뒤 덩실덩실 어깨춤을 춘다.
우리의 정서다. 작금의 우리 민족이 자꾸만 잃어버리고 있는,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우리만의 가슴에 새겨진 영혼이자 정체성이다. 우리가 외래문화에 젖어 세계와 소통한다고 에둘러 변명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런 소리에 반응하며 영혼이 비에 젖듯 하는 이유다. 함께 웃고 울며 부대끼는 진짜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전통문화예술은 점점 소멸해가고 있다. 작금의 우리 사회가 저출생으로 골머리를 앓듯이 우리의 전통문화 역시 그렇게 외래문화에 잠식되면서 우리민족은 불행하게도 스스로의 정체성을 정의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시대에 판소리 고법이수자, 무형문화재 심청가 이수자를 아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될까?
박세연 대표 역시 젊은 청년으로 우리가 미디어에서 흔하게 보아온 할머니 세대가 아니다. 그래서 더 희소가치가 있고, ‘도대체 어떤 보람을 느끼기에 이런 길에 들어섰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 수밖에 없다. 이미 우리 사회가 이토록 전통문화에서 멀리 비켜선 지 오래기 때문이다.
“제가 보람을 느끼는 것은 타인에 대한 봉사 이전에 저 자신에게 충실한 것입니다. 제가 존재의 목적을 가지고 존재해야 되기 때문이지요. 공연을 하는 사람으로서 관객이 절대적이지만, 먼저는 제가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관객도 그렇게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라고 박 대표는 말한다.
“이런 게 저는 자신을 찾아가는 느낌이에요. 제가 이렇게 행복해야 저의 감정을 그대로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정체성을 확인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야 관객들에게 저의 이런 에너지를 주면서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유, 즉 부모나 스승에게 물려받았다거나 해야만 하는 의무감이 아니라 그의 영혼과 마음이 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진심으로, 오롯이 좋아하는 일이 이것뿐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창극 아니면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말한다. 창극이 자신의 전부이고 정체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영혼이 담긴 훌륭한 소리꾼이자 선생이다.
“청강창극단은 저희 스승님의 호인 ‘청강’을 따서 만든 것입니다. 저희 스승님은 판소리 고법 중요무형문화재인 정철호 선생님이셨어요. 지난 2022년 작고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창극뿐만 아니라 직접 수많은 곡을 만드셨고, 지금도 많이 부르고 있는 신민요들을 다 작곡하신 큰 선생님이십니다.”
21살에 늦깎이로 소리를 시작한 박 대표는 “선생님이 걸으신 길을 또 제가 뒤를 이어 걸으면서 누가 되지 않고, 비록 선생님처럼 큰 사람은 될 수 없을지라도 조금이나마 보답하고 싶은 마음에 창극단을 꾸려서 활동을 하고 있다”면서 큰 스승을 회고했다.
대학에서 실용음악을 전공한 그는 어느 날 우연히 스승과 연이 닿아 21살의 늦은 나이에 창극에 입문, 소리를 하게 되었지만 자신의 내면에서 소리에 대한 갈급, 꿈틀거림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이런 알 수 없는 내면의 꿈틀거림을 큰 스승이 발견, 제자를 삼으면서 그의 판소리는 스승의 모범과 가르침으로 전국 국악대전 대통령상이라는 꽃을 피우고, 국가무형문화재 이수자로 등재되었을 게다.
“어렸을 때부터 내면에 그게 있었던 것 같아요. 어린시절, 마을분들이 모두 악기를 한 개씩 다루기도 하고, 조그마한 거라도 무슨 일이 있으면 동네가 거의 축제 분위기였잖아요. 저는 그런 게 너무 좋아서 마음에 담고 있었는데, 선생님과 연이 닿은 것이지요.”
그는 현재 광주 광역시에서 청강창극단을 운영하면서 주말이면 북이면에 거주하고 있는 어머니를 찾는다. 그러다가 예전부터 알고 있던 북이면 주민자치위원장과 북이면에서 주말 창극을 시작한 지 1년여가 되었다. 그동안 여러 마을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공연을 했고, 앞으로도 여전히 그렇게 할 계획이다.
차가 없는 노인들과 아이들을 위해서 박 대표가 공연단을 직접 꾸려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오는 19일은 황룡면에서 개최되는 ‘칼 갈이 행사’에도 참여해 공연을 한다. 이처럼 박 대표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시간과 재능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면서 북이면을 비롯한 주변 이웃이나 인사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있다.
“어르신들이 ‘와줘서 고맙소’ 하면서 손을 잡아주면 진짜 세상 다 얻은 기분이에요. 다들 너무 좋아하세요. 아이들도 그렇고. 조그만 면단위에서는 공연이라는 거 자체가 낯 설 거예요. 아마 이런 공연 자체가 거의 없어서 어르신들이 손을 잡아주며 반가워하시는 거죠.”
“공연을 하나 올리기 위해서 6개월에서 1년 이상이 걸린다”는 그는 역사적인 주제를 공연으로 풀어내기도 해서 공부를 아주 많이 한다. 대표적으로 ‘동학’이 그랬고, 앞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을 해보고 싶어 구상 중이다. 그런 와중에도 틈틈이 주말에 시간을 내서 장성군 지역의 마을공연을 하는 것이다.
오는 8월 10일, 장성군문화예술회관 소극장에서 축령산 임종국 선생 이야기로 만든 국악뮤지컬 ‘8월의 선물’을 공연하며, 이어서 9월 21일에는 장성군 주최로 실경창극 '선비의 길'을 필암서원에서 공연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서 100인 합창단을 모집 중에 있다. 이 공연은 공모사업으로, 장성군이 주최하고 박 대표의 청강창극단이 주관한다. 합창단 지휘는 박 대표 극단의 음악감독이자 KBS 국악관현악단장을 역임한 김상철 씨가 맡는다.
“북이면 공연 이전에도 원래 저희가 봉사 공연은 다른 데서도 계속하고 있었어요. 2014년도부터 광주 보훈요양병원공연을 고정적으로 계속했지요. 그런데 코로나가 터지면서 공연이 잠시 중단되기도 했지만 정기적으로 매월 둘째 주 화요일에 공연을 했습니다. 극단이 저희 제자들로 거의 구성이 되어있고, 주말에 와서 연습하고 공연을 합니다. 저만 장성 사람이고 연출이나 전문 배우들은 외부에서 섭외를 해요.”
비영리단체로 극단을 운영하는 부대비용 등 여러 제약이 있지만, 여건이 되는 대로 서울에서도 내려와 참여해 주는 김영만 연출가 및 배우들에게 늘 감사하고 고맙다고 박 대표는 말한다. 이렇게 사람이나 장비가 움직이면 반드시 비용이 발생하기 마련인 데도 꾸준하게 봉사공연을 펼치는 그의 장인정신은 외래문화에 점령된 우리 사회가 성찰할 부문이다.
우리의 전통문화예술이 점점 사라져가는 것을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지키고 있는 걸 게다. 그의 스승이 그랬듯이 그 역시도 자신을 활활 불태워 우리 민족의 정서이자 가슴 저 밑바닥에 여전히 드리워져 있는 우리만의 소리, 즉 정체성을 지켜내고 싶은 것이 아닐까? 그것이 우리의 영혼과 가슴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신명과 삶의 신산한 것들이고,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우리만의 것이므로.
우리의 전통문화예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국가는 물론, 지자체 및 각 지역의회에서 조례를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축제를 비롯한 모든 행사에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예술을 포함하는 것도 전통문화예술인들을 격려하고 응원하는 후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우리 자신은 물론, 우리 선조와의 연결이며 민족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작가 이청준의 소설을 영화화한 ‘서편제’는 남도의 판소리 창법 갈래의 하나인 서편제를 소재 삼은 이야기다. 소리에 집착하는 아버지 유봉과 그로 인해 눈이 멀어가는 송화는 우리 고유의 소리가 단순한 예술의 차원을 넘어 삶의 한(恨)으로써 그려내는 인간애와 다르지 않음을 말하면서 우리 사회에 커다란 울림을 주었다.
우리의 전통문화 속에는 보다 순결하고, 소박하고, 영구적이며, 도덕적인 의미와 더불어 지극한 가족애가 내포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이다. 그래서 박 대표가 마을공연에서 들려주는 판소리 ‘심청가’ 속 심청과 아비 심봉사가 상봉하는 대목은 우리 시대에 하나의 상징이다. 영혼이 담겨있는 우리의 가락은 눈을 떠야 비로소 들린다. “소리 꽃이 피었습니다!”
<이재국 기자 jcseoffice@gmail.com>